돈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지갑 속 5만원권은 종이 한 장이고, 통장 속 300만원은 은행 컴퓨터에 적힌 숫자 몇 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고 밥을 주고, 일을 해 주고, 집을 내준다. 돈은 왜 생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가 어떻게 새로 만들어 내는가. 이 장은 장터에서 시작해 은행의 장부, 그리고 한국은행의 회의실까지 따라간다. 마지막에 알게 되는 사실은 조금 놀랍다. 우리가 쓰는 돈의 대부분은 누군가 대출을 받는 순간 생겨난다.
- 물물교환이 왜 막히는지(욕구의 이중 일치)를 직접 장을 열어 보고, 화폐의 세 기능을 설명한다.
- 상품화폐에서 금본위, 법정화폐, 장부 속 디지털 돈으로 바뀐 이유를 말한다.
- 예금 → 지급준비금 → 대출 → 다시 예금으로 이어지는 신용 창조와 통화승수를 계산한다.
- 본원통화, M1, M2가 무엇을 담는지 구분하고 한국 통화량의 대략적인 크기를 감 잡는다.
- 뱅크런이 왜 건전한 은행도 무너뜨리는지, 예금자 보호와 중앙은행이 그것을 어떻게 막는지 본다.
- 기준금리가 통화량에, 통화량이 물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화폐수량설로 짚는다.
물물교환의 벽: 욕구의 이중 일치
돈이 없는 마을을 상상해 보자. 쌀 농사를 짓는 사람이 꿀이 먹고 싶다. 꿀을 가진 사람을 찾아갔더니 그 사람은 쌀이 아니라 솥을 원한다.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려면 내가 가진 것을 상대가 원하고, 동시에 상대가 가진 것을 내가 원해야 한다. 이 까다로운 조건을 욕구의 이중 일치(Double coincidence of wants)라고 부른다. 두 사람의 바람이 서로 정확히 맞물려야 한다는 뜻이다.
물건이 몇 가지뿐이라면 그런 짝을 찾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물건 종류가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아래 마을에서 사람마다 가진 물건 하나(원 안의 글자)와 원하는 물건 하나(바깥 금색 글자)가 무작위로 정해진다. 시장 하루를 눌러 장을 열고, 물물교환과 화폐를 번갈아 눌러 같은 날의 결과를 비교해 본다.
물물교환 마을: 장이 열리면 몇 명이나 원하는 것을 얻는가
물건이 8가지면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서로 맞을 확률은 상대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을 확률 \(1/8\)에 상대가 내 것을 원할 확률 \(1/7\)을 곱한 1/56, 약 2%다. 물건이 늘수록 이 확률은 거의 제곱으로 줄어든다. 반면 화폐가 있으면 조건이 절반으로 풀린다. 상대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기만 하면 되니 한 번 만날 때 성공 확률이 1/8, 약 12.5%로 일곱 배쯤 높다. 쌀 농부는 쌀을 원하는 아무에게나 쌀을 팔고, 받은 돈으로 꿀을 가진 아무에게서나 꿀을 산다. 한 번의 교환이 '파는 일'과 '사는 일' 두 번으로 쪼개지면서 서로의 바람이 맞물릴 필요가 사라진다.
물건 종류가 늘면 생기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쌀 한 말이 꿀 몇 병인지, 솥 하나가 옷 몇 벌인지, 모든 물건 쌍의 교환비율을 기억해야 한다. 아래에서 물건 종류를 늘려 본다. 점 하나에 마우스를 올리거나 눌러 보면 그 물건이 알아야 하는 비율이 강조된다.
교환비율의 그물 vs 가격표 한 장
\(K\)가지 물건의 교환비율은 \(K(K-1)/2\)개다. 동네 마트에 물건이 1만 가지라면 약 5,000만 개의 비율이 필요하다. 화폐로 재면 가격표 1만 장이면 된다. 돈은 모든 물건을 한 줄자로 잰다.
화폐의 세 기능
앞의 두 시뮬레이터가 보여 준 것이 화폐가 하는 일의 두 가지다. 여기에 하나를 더하면 경제학 교과서가 말하는 화폐의 세 기능이 된다.
| 기능 | 뜻 | 없으면 생기는 일 |
|---|---|---|
| 교환의 매개(Medium of exchange) | 누구나 받아 주는 중간 물건. 교환을 '팔기'와 '사기'로 쪼갠다. | 욕구의 이중 일치를 찾아 헤맨다. |
| 가치의 척도(Unit of account) | 모든 값을 같은 단위(원)로 잰다. 가격, 월급, 빚, 순자산이 모두 같은 자로 비교된다. | 물건 쌍마다 교환비율을 따로 외운다. |
| 가치의 저장(Store of value) | 오늘 번 것을 나중에 쓸 수 있게 담아 둔다. | 생선은 썩고 쌀은 쥐가 먹는다. 번 날 다 써야 한다. |
무엇이든 이 세 가지를 잘하면 돈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조개껍데기, 소금, 쌀, 삼베, 담배, 금과 은을 돈으로 썼다. 좋은 돈의 조건도 여기서 나온다. 누구나 알아보고(인지 가능), 잘게 나눌 수 있고(분할 가능), 들고 다니기 쉽고(휴대성), 썩지 않고(내구성), 함부로 늘릴 수 없어야(희소성) 한다. 세 번째 기능, 가치의 저장은 이 책 내내 다시 나온다. 돈이 가치를 얼마나 잘 담아 두는지가 바로 3장의 물가 이야기다.
조개에서 금으로, 금에서 약속으로
돈의 역사는 '진짜 가치가 있는 물건'에서 '가치가 있다는 약속'으로 옮겨 온 역사다.
상품화폐(Commodity money)는 물건 자체에 쓸모가 있었다. 쌀은 먹을 수 있고 삼베는 입을 수 있다. 하지만 무겁고 썩고 품질이 들쭉날쭉하다. 금과 은은 썩지 않고 잘게 나눌 수 있어서 오래 살아남았다. 그런데 금화도 들고 다니기 무겁다. 그래서 금은 금고에 두고 "이 종이를 가져오면 금을 내준다"는 보관증을 돌려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금본위제(Gold standard)의 태환지폐다. 지폐의 양이 금고 속 금의 양에 묶인다.
금에 묶인 돈은 믿음직하지만 족쇄가 있다. 경제는 커지는데 금광에서 캐는 금이 그만큼 늘지 않으면, 같은 돈으로 더 많은 물건을 사고팔아야 하므로 물가가 내려간다. 물가가 계속 내리면(디플레이션) 빚을 진 사람의 부담이 실질로 커지고,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 않고 기다린다. 아래에서 금이 늘어나는 속도와 경제가 커지는 속도를 바꿔 본다.
금본위의 족쇄: 금이 경제를 못 따라가면
금본위에서 물가를 정하는 것은 금광과 경제 성장의 경주다. 사람이 손댈 수 없으니 함부로 돈을 찍는 정부를 막아 주는 장점이 있지만, 불황에 돈이 부족해도 늘릴 방법이 없다. 1930년대 대공황 때 금본위를 일찍 버린 나라일수록 빨리 회복했다는 연구가 많다. 2차 대전 뒤 브레턴우즈 체제에서는 미국 달러만 금 1온스 = 35달러로 묶고 다른 나라 돈은 달러에 고정했다. 그러나 1971년 미국이 달러를 금으로 바꿔 주는 일을 멈추면서 세계의 돈은 금과의 마지막 끈을 놓았다.
그 뒤의 돈이 법정화폐(Fiat money)다. 금과 바꿔 주지 않는다. 가치를 받치는 것은 세 가지다. 법이 이 돈으로 세금과 빚을 갚게 정했고, 모두가 이 돈을 받을 거라고 믿으며, 중앙은행이 돈의 양을 조절해 가치를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그래프의 초록 선처럼 중앙은행은 보통 물가가 연 2% 정도 천천히 오르도록 돈의 양을 맞춘다. 약속이 깨지면, 즉 중앙은행이 돈을 마구 찍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이 장 끝에서 본다.
대부분의 돈은 장부의 숫자다
오늘 한국에서 '돈'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지폐와 동전은 아주 작은 부분이다. 대부분은 은행 전산 장부에 적힌 예금 잔액이다. 월급날 회사가 월급을 '보낸다'고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지폐는 한 장도 없다. 회사 계좌의 숫자가 줄고 내 계좌의 숫자가 늘 뿐이다.
아래는 한결의 첫 월급날이다. 실수령 2,655,840원이 회사 계좌에서 한결 계좌로 옮겨진다. 회사와 한결이 같은 은행을 쓸 때와 다른 은행을 쓸 때를 바꿔 가며 이체해 본다.
월급날의 장부: 움직이는 것은 숫자뿐이다
예금은 은행이 나에게 진 빚이다. 내 통장의 300만원은 "은행이 한결에게 300만원을 언제든 내주겠다"는 약속이고, 은행 재무상태표에서는 부채 칸에 적힌다. 그 약속이 현금만큼 믿을 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금을 돈처럼 쓴다. 다른 은행으로 돈을 보낼 때 은행끼리는 각자 한국은행에 맡겨 둔 계좌, 곧 지급준비금(Reserves)으로 결제한다. 은행의 돈은 한국은행 장부에, 우리의 돈은 은행 장부에 적힌 셈이다. 돈은 장부가 두 층으로 포개진 구조다.
은행은 돈을 만든다: 신용 창조
은행은 맡은 돈을 전부 금고에 두지 않는다.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찾으러 오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일부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대출해 준다. 남겨 두는 비율이 지급준비율(Reserve ratio)이다. 한국은행은 은행이 최소한 남겨야 할 비율을 정해 두었다.
| 예금 종류 | 지급준비율 |
|---|---|
| 요구불예금 (보통·당좌 등 언제든 찾는 돈) | 7% |
| 정기예금·정기적금·양도성예금증서 등 | 2% |
| 장기주택마련저축 등 일부 장기 상품 | 0% |
여기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결이 300만원을 입출금 통장에 맡긴다. 은행은 7%인 21만원을 남기고 279만원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다. 빌린 사람은 그 돈으로 가구를 사고, 가구점 주인은 받은 279만원을 자기 은행에 맡긴다. 이제 한결 통장에 300만원, 가구점 주인 통장에 279만원이 있다. 한결의 돈은 줄지 않았는데 세상의 예금은 579만원이 되었다. 그 은행이 또 일부를 남기고 빌려주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이것이 신용 창조(Credit creation)다.
아래에서 한 단계씩 눌러 돈이 은행에서 은행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본다. 지급준비율을 바꾸고, 대출받은 돈 일부를 사람들이 현금으로 쥐고 있게 해 본다.
신용 창조의 연쇄: 300만원이 어디까지 불어나는가
각 단계에서 새로 생기는 예금은 앞 단계의 \((1-r)\)배다. 이 수열을 끝까지 더하면 처음 예금의 \(1/r\)배가 된다.
지급준비율 10%면 10배, 7%면 약 14배, 2%면 50배다. 이 배수를 단순 통화승수(Money multiplier)라고 한다. 지급준비율이 낮을수록 같은 돈에서 더 많은 예금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남겨 둔 현금도 그만큼 얇아진다. 그 얇음이 뒤에서 볼 뱅크런의 씨앗이다.
본원통화와 M2: 돈을 세는 여러 개의 자
'돈이 얼마나 있느냐'는 어디까지를 돈으로 치느냐에 따라 답이 다르다. 지갑의 현금만 셀 수도 있고,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예금까지, 혹은 만기가 있는 적금까지 셀 수도 있다. 한국은행은 이것을 몇 개의 지표로 나눠 발표한다.
- 본원통화(Monetary base): 한국은행이 발행한 돈. 현금과 은행의 지급준비금. '돈의 씨앗'이다.
- M1, 협의통화: 현금 +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예금. 지금 당장 결제에 쓸 수 있는 돈.
- M2, 광의통화: M1 + 만기 2년 미만의 정기예적금과 시장형 금융상품. 조금만 기다리면 쓸 수 있는 돈. 뉴스에서 '통화량'이라고 하면 보통 M2다.
본원통화와 M2의 비율이 실제 통화승수다. 앞의 단순한 \(1/r\)에 사람들이 현금으로 쥐고 있는 몫까지 넣으면 아래 식이 된다. 아래 곡선 위의 손잡이를 좌우로 끌어 지급준비율을 바꾸고, 슬라이더로 현금 보유 성향을 바꿔 본다.
통화승수: 씨앗 돈 1원이 몇 원의 통화량이 되는가
숫자가 너무 커서 감이 오지 않는다면 크기를 그림으로 비교해 본다. 아래 정사각형의 넓이는 금액에 비례한다. 1인당으로 바꾸면 한국 인구 약 5,100만 명으로 나눈 값이 된다.
한국 통화량의 크기 감각
| 지표 (대략값) | 금액 | 1인당 |
|---|---|---|
| 현금통화 (시중의 지폐·동전) | 약 200조원 | 약 390만원 |
| 본원통화 | 약 300조원 | 약 590만원 |
| M1 (협의통화) | 약 1,300조원 | 약 2,550만원 |
| M2 (광의통화) | 약 4,400조원 | 약 8,600만원 |
현금 1인당 390만원이라는 숫자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지갑에 그만큼 있는 사람은 드물다. 발행된 5만원권의 상당 부분은 지갑이 아니라 금고와 장롱 속에 머문다. 반대로 매일 쓰는 결제의 대부분은 카드와 이체, 곧 장부의 숫자로 이루어진다.
뱅크런: 모두가 동시에 찾으러 오면
신용 창조는 은행이 예금의 일부만 현금으로 남겨 둔다는 데서 출발한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다. 매일 찾아가는 사람과 새로 맡기는 사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은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늦게 가면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가 한꺼번에 몰려간다. 이것이 뱅크런(Bank run)이다.
무서운 점은 건전한 은행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은행의 돈은 대부분 수년짜리 대출로 나가 있어서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없다. 예금은 오늘 찾을 수 있는데 대출은 10년 뒤에 돌아온다. 이 만기 불일치가 은행의 본성이다. 아래 은행은 예금자 100명이 1,000만원씩 모두 10억원을 맡겼다. 소문을 퍼뜨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본다.
뱅크런: 소문이 은행의 현금을 바닥낸다
뱅크런은 스스로를 키운다. 찾아간 사람이 늘수록 금고가 비고, 금고가 빌수록 남은 사람의 불안이 커진다. 은행이 실제로 건전했는지는 상관이 없다. 소문이 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각국은 두 가지 안전장치를 둔다.
- 예금자 보호(Deposit insurance): 은행이 문을 닫아도 예금보험공사가 1인당, 금융회사별로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억원까지 대신 돌려준다(2026년 기준, 2025년 9월 5,000만원에서 상향). 보호받는 예금자는 줄을 설 이유가 없다. 자세한 활용은 8장에서 다룬다.
-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은행이 일시적으로 현금이 모자라면 중앙은행이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준다. 은행이 지급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면 공황은 가라앉는다.
중앙은행과 기준금리
본원통화를 만들고, 은행들의 은행 역할을 하고, 뱅크런 때 마지막으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중앙은행(Central bank)이다. 한국의 중앙은행은 1950년에 세워진 한국은행이다. 한국은행법이 정한 첫 번째 목표는 물가 안정이고, 지금은 소비자물가 상승률 연 2%를 목표로 삼는다.
기준금리(Base rate)는 한국은행이 은행들과 7일짜리 환매조건부채권(RP)을 사고팔 때 쓰는 금리다. 한국은행은 시장에서 채권을 사서 돈을 풀거나 팔아서 돈을 거둬들이며(공개시장운영) 은행 간 하루짜리 금리를 기준금리 근처에 묶어 둔다. 2026년 기준 한국의 기준금리는 연 2%대 중반 수준이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은행의 자금 조달 비용이 오르고, 대출 금리가 올라 빌리려는 사람이 줄어든다. 대출이 줄면 앞에서 본 신용 창조가 느려져 통화량이 천천히 는다.
아래에서 앞으로 8년의 기준금리 경로를 직접 그려 본다. 해마다의 손잡이를 위아래로 끌면 아래 그래프에서 통화량(M2)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인다.
기준금리 경로를 그리면 통화량이 따라온다
기준금리가 경기, 환율, 집값과 내 대출 이자에 어떤 경로로 번지는지는 5장에서 더 자세히 본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다. 한국은행은 돈을 직접 찍어 뿌리기보다 돈의 가격(금리)을 움직여 은행과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만들지를 조절한다.
돈이 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돈이 많아지면 모두가 부자가 될까. 나라 안의 모든 돈이 하룻밤 사이 두 배가 되었다고 해 보자. 물건의 양은 그대로다. 사람들이 같은 물건을 놓고 두 배의 돈을 내밀면, 가게는 값을 올린다. 결국 물가가 두 배가 되고 모두의 실제 형편은 그대로다. 이 직관을 정리한 것이 화폐수량설(Quantity theory of money)이다.
왼쪽은 1년 동안 돈이 쓰인 총액, 오른쪽은 1년 동안 팔린 물건의 총값이다. 같은 거래를 두 방향에서 센 것이니 항상 같다. 쓸모는 증가율로 바꿨을 때 나온다. 통화량이 6% 늘고 유통속도가 1% 줄고 경제가 2.5% 자라면 물가는 대략 6 − 1 − 2.5 = 2.5%, 정확히는 약 2.4% 오른다. 슬라이더를 움직이고 프리셋을 눌러 본다.
MV = PY: 돈이 물건보다 빨리 늘면
역사 속 초인플레이션, 1920년대 독일과 2000년대 짐바브웨, 2010년대 베네수엘라는 모두 정부가 빚을 갚거나 재정을 메우려고 중앙은행에 돈을 찍게 한 경우였다. 그래서 많은 나라가 중앙은행을 정부에서 독립시키고 물가 안정을 첫 목표로 법에 적었다. 반대로 통화량이 늘지 않으면 금본위 시뮬레이터에서 본 디플레이션이 온다. 중앙은행의 일은 돈이 경제가 크는 속도보다 조금만 빨리 늘게 하는 것이다.
물가가 오르면 내 통장의 같은 숫자가 해마다 덜 사게 된다. 물가를 어떻게 재는지, 내 돈의 실질 가치가 얼마나 녹는지는 바로 다음 3장에서 다룬다.
한결의 가계부: 월급은 장부의 숫자다
회사 통장에서 한결 통장으로 옮겨진 2,655,840원
1월 월급날, 한결의 첫 월급 실수령 +2,655,840원이 들어왔다. 지폐는 한 장도 움직이지 않았다. 회사가 거래하는 은행의 장부에서 숫자가 줄고, 한결 은행의 장부에서 숫자가 늘었다. 두 은행이 다르다면 은행끼리는 한국은행에 맡겨 둔 지급준비금으로 차액을 맞췄다.
입사 전부터 있던 통장 잔고 300만원도 다시 보자. 한결에게 이 돈은 '내 돈'이지만, 은행에게는 한결에게 진 빚이다. 수시입출식 통장이니 은행은 지급준비율 7%인 21만원만 남기고 279만원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줄 수 있다. 그 돈이 누군가의 통장에 다시 예금으로 들어가고, 또 빌려 나가기를 끝까지 되풀이하면 한결의 300만원 한 덩이에서 세상의 예금이 이론상 최대 약 4,286만원(300만원 ÷ 0.07)까지 불어날 수 있다. 한결의 잔고는 그동안 1원도 줄지 않는다.
핵심 정리
- 물물교환은 욕구의 이중 일치가 필요해서 물건 종류가 늘수록 거의 성사되지 않는다. 화폐는 교환을 팔기와 사기로 쪼개 이 문제를 푼다.
- 화폐의 세 기능은 교환의 매개, 가치의 척도, 가치의 저장이다. \(K\)가지 물건에 교환비율 \(K(K-1)/2\)개 대신 가격 \(K\)개면 된다.
- 돈은 물품화폐 → 금속 주화 → 금본위 태환지폐 → 법정화폐로 바뀌었다. 금본위는 돈의 양을 금광에 맡겨 디플레이션에 취약했고, 1971년 이후 세계의 돈은 금과의 끈이 끊긴 약속이다.
- 오늘 돈의 대부분(M2의 약 95%)은 은행 장부의 예금이다. 예금은 은행이 예금자에게 진 빚이고, 은행끼리는 한국은행의 지급준비금으로 결제한다.
- 은행은 예금의 일부만 남기고 빌려주며, 빌려준 돈이 다시 예금이 된다. 처음 예금의 최대 \(1/r\)배까지 예금이 불어나는 것이 신용 창조다. 실제로는 대출 승인과 동시에 예금이 생긴다.
- 본원통화(약 300조원)는 한국은행이 만든 씨앗 돈, M2(약 4,400조원)는 그 위에 은행이 쌓은 통화량이다. 통화승수 \(m = (1+c)/(c+r)\)는 한국에서 약 15다.
- 은행은 만기 불일치 때문에 뱅크런에 약하다. 예금자 보호(1인·금융회사별 1억원)와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역할이 공황을 막는다.
-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로 돈의 가격을 움직여 대출과 통화량을 조절한다. 화폐수량설 \(MV = PY\)에 따르면 통화량이 생산보다 빨리 늘면 물가가 오른다.
확인 퀴즈
물건이 10가지인 마을에서 물물교환으로 거래하려 한다.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
지급준비율이 20%이고 대출금이 현금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하자. 누군가 100만원을 새로 예금했을 때, 신용 창조로 늘어날 수 있는 총예금의 최대치는?
장부상 대출이 모두 정상적으로 상환되고 있는 건전한 은행도 뱅크런으로 무너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1년 동안 통화량이 8% 늘고, 유통속도는 그대로이며, 실질 생산이 3% 늘었다. 화폐수량설로 본 물가 상승률은 대략 얼마인가?